시조(始祖)의 출생(出生)과 시대적 배경
우리 안동김씨의 시조는 신라말기에 태어나셔서 신라(新羅)의 고창군(古昌郡)1) 성주(城主)를 지내셨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게된 큰 전쟁에서 제일 큰 공적을 세우시어 태사(太師)란 벼슬을 받으신 휘(諱)2) 선평(宣平)이시다.
신라와 고려의 역사가 그렇듯이 시조(始祖)에 관한 기록은 단편적으로 여러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나 고려실록이라던가 고려사등의 멸실로 정확한 것은 알수가 없다.
다만 서기 901년 경주 흥덕궁에서 태어 났으며 26살에 고창 성주가 되었다는 기록은 고려사에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효공왕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효공왕은 자식이 없으므로 효공왕의 아들은 아니다. 그래서 시조공의 상계는 알 길이 없으며 여러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그러나 여러곳에서 시조(始祖)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실어 놓았기에 여기 옮겨 적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시조 태사공께서는 신라 제 52대 효공왕5년(901년)에 신라의 고도 경주(慶州)의 궁궐 흥덕궁에서 탄생하셨다. 공께서는 별같이 맑고 반짝이는 정기와 호랑이의 용맹한 위상으로 대장부의 기질이 몸에 배인 성정이셨으며, 외관상으로는 ‘봉황의 눈과 용의 수염’3)을 갖고 태어나셨다.
따라서 공께서는 성장함에 따라 문무를 겸비하여 세인들에게 추앙을 받으면서 큰인물로 자리잡아 나가게 되어 신라 경애왕3년(서기928년)에는 당년 26세에 신라국으로 부터 신라 동북부의 가장 요새지인 고창군(古昌郡) 성주(城主)로 임명되었으며 취임후에는 백성을 아끼는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받아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국가에는 충신의 도리를 다하여 국사를 돌보는 데에도 한치의 부족함이 없어 신임이 아주 두터웠다.”
당시 신라말 진성여왕 시절에는 국고가 탕진되어 이를 충당하고자 지방의 호족이나 백성들에게 폭압적으로 조세를 징수하였다.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민란이 발생하고 왕실과 귀족들간의 극심한 권력투쟁으로 정치는 문란해지고 국력은 급속히 쇠퇴해져 갔다.
이렇게 신라가 쇠퇴해짐에 따라 궁예는 한반도의 북부 지방에 세력을 규합하여 901년 후고구려를 세우고 개성(開城)을 수도로 삼았다. 그후 궁예가 세력을 키워나가는 도중 905년 철원으로 수도를 옮겨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그러나 궁예가 왕권을 강화한 후에는 건국 초기와 달리 학정(虐政)을 일삼아 민심을 잃게되었다. 그래서 궁예의 부하 왕건(王建)이 서기 918년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유금필(庾黔弼)등과 같이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고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후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919년에 개성(開城)에 도읍을 세웠다.
또 한편으론 서기 892년에 견훤(甄萱)이 사벌주(沙伐州)4)를 근거지로 삼고 그 세력을 확장하여 무진주(武珍州)5)에서 위세를 떨치면서 서기 900년에 완산주(完山州)6)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움으로써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신라의 왕권 정치가 문란하여 지방 통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자 각 지방의 호족(豪族)7)들이 권력화되어 백성들을 통치하고 있었다. 고려 왕건은 호족세력들을 무력과 유화(宥和)8)로써 복속시켜 나가고 신라와는 유화 정책으로 고려 초기 정권을 안정시켜 나갔으므로 고려와 신라는 밀월적인 협력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에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상주와 영천을 함락한 후 경주로 진격하여 포석정에서 연회을 베풀고 있던9) 경애왕(景哀王)10)을 살해하고 비빈(妃嬪)을 능욕하고 경순왕(敬順王)11) 김부(金傅)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런 소식을 접한 고창 성주인 김선평(金宣平)은 견훤의 폭거에 대하여 끓어오르는 분노로 복수의 길을 모색하면서 한편으로는 군민들과 함께 군사력을 보강해 나갔다.
신라가 후백제의 견훤에게 유린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려 왕건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경애왕을 애도하였는데 견훤은 신라와 고려가 동맹관계로 발전되어 밀착되는 것을 염려하여 신라를 재차 공격하고 경순왕3년(929년) 7월에는 의성(義城),일직(一直), 풍산(豊山)을 잇달아 격파하였으며, 그해 12월에는 고창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왕건도 신라와 고창을 구하기 위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신속히 고창으로 내려와 예안(禮安)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전진 대책을 의논하고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창 성주인 김선평(金宣平)도 신라의 임금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하는 등의 불의한 행위를 한 견훤에 대하여 상당한 반감을 지니고 있던중 왕건이 예안에 도착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견훤을 토벌하기 위해 왕건과 협력해야 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당시 왕건의 군대는 삼천여명으로 견훤의 일만 군대에 비해 열세여서 쉽게 전쟁을 치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고창군의 유력한 호족인 김선평(金宣平)이 김행(金幸), 장길(張吉)과 의논하여 왕건을 돕기로 함으로써 세력의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김선평, 김행, 장길은 왕건의 군막을 찾아가서 고려에 귀부(歸附)12)할 뜻을 밝혔다.
그후 병산(甁山)13)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병산대첩에서의 패배로 후백제는 멸망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고려 왕건이 병산대첩에서 크게 승전하자 세력의 변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안동 부근 여러 호족들이 후속적으로 투항해와 초기 고려국을 건국하는데 큰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삼국 통일의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시조의 향년은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고려 성종 2년(983년) 안동부의 백성들이 삼태사공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안동부 부사(府司)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안동 태사묘(太師廟)14) 창건 유래 기록에서 향년을 추측할수 있을 뿐이다.
1) 고창군(古昌郡) : 현재의 안동시이나 당시에는 길 안,풍산,일직,예안등 인근 지역은 독립되어 고창 은 현재의 시가지 안쪽뿐이었다. 따라서 고창의 면적이나 인구는 아주 미미했을 것 같다.
2) 휘(諱) : 돌아가신분의 이름
3) 봉안용수(鳳眼龍鬚) 성정호위(星精虎威)라고 동국 여지승람에 기술됨.
4) 사벌주(沙伐州) : 현재의 상주
5) 무진주(武珍州) : 현재의 광주광역시
6) 완산주(完山州) : 현재의 전주
7) 호족(豪族) :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동을 주도적 으로 이끈 지방세력. 호족이란 원래 중국의 남쪽 에서 산출되는 털이 곧고 질 좋은 짐승을 뜻하는 호(豪)와 친족집단을 뜻하는 족(族)이 합쳐져 이루 어진 말이다. 따라서 호족은 지방에 있는 뛰어나 고 우수한 친족집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8) 유화(宥和) : 상대자의 태도를 너그럽게 보아 주어 사이좋게 하는 것
9) 일설에는 연회가 아니라 최후의 결전을 논의 하던 중이라고도 함
10) 경애왕(景哀王) : 재위 924∼927. 성은 박씨(朴 氏), 이름은 위응(魏膺). 아버지는 신덕왕이며, 어 머니는 헌강왕의 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資 成 · 懿成 · 孝資王后)이다.
11) 경순왕(敬順王) :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935년이며,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쳤다.
12) 귀부(歸附) : 귀순,굴복(屈服)하고 순종(順從)함
13) 병산(甁山) : 현재의 와룡면 서지리
14) 태사묘(太師廟) : 고려 건국시 후백제 견훤을 토 벌한 개국공신 김선평·권행·장길등 삼태사의 위 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1540년(중종 35년) 안동부사 김광철(金光轍)이 현위치에 사묘를 건 립하였다. 1556년 안동부사로 부임한 권소는 권 씨 성을 가진 수석 호장(戶長)에게 관리를 맡겨 매년 제사를 받들게 하는 등 제도화에 힘썼다.
태사묘사실기년(太師廟事實紀年)에 따르면, 983년(성종 2) 처음으로 안동부사(安東府司) 에서 삼공신의 제사를 거행하였다 한다. 1481 년(성종 12) 관찰사 김자행이 묘우(廟宇)를 세 우는 터전을 마련하였고, 이어서 1542년(중종 37) 안동부사 김광철(金光轍)이 현 위치에 묘 우를 건립하였다. 1613년 규모를 확대·개건하 였다. 그 후에도 계속 증축하고 수리하여 왔으 나 6·25전쟁중에 전소되어 1958년에 재건하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