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전투(甁山戰鬪)
1)기록으로 본 병산전투
병산의 지명에 관하여 이설이 있는데 현재 병산서원(屛山書院)1)이 있는 병산 과 병산전투의 병산은 별개의 지역이다.
병산서원은 풍천면 병산리에 있고 병산전투가 벌어진 곳은 와룡면 서지리(西枝里)이다.
후삼국시대의 패권을 다투는 격전지로는 안동과 합천 지역을 꼽을 수 있다. 왕건(王建)과 견훤(甄萱)은 이 두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920년 보마군(步馬軍)2) 1만인으로 대야성(大耶城)3)을 쳐 함락시킨 견훤은 군사를 진례성(進禮城)4)으로 옮겼다. 다급한 신라 경명왕(景明王)5)은 아찬(阿粲)6) 김률(金律)을 고려에 파견해 구원을 청하였다.
그 뒤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안동·상주 지역에서의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는 열기를 더해갔지만, 고려가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견훤이 아들 수미강(須彌强)에게 대야성(大耶城), 문소성(聞韶城)7)의 군사를 이끌고 조물성(曹物城)8)을 공격하게 했지만 조물성 장병들이 철통 같이 성을 수비한 까닭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아무런 전과 없이 대치해오는 장기전으로 변모했다. 따라서 견훤과 왕건 양측은 장기전에 대한 부담때문에 잠시 화친을 하게 된다. 인질을 상호 교환하여 화친을 하면서 왕건은 후백제에 조카 왕신(王信)을, 견훤은 고려에 조카 진호(眞虎)를 보냈다.
그러나 926년 왕건에게 인질로 보낸 견훤의 조카 진호(眞虎)가 죽자, 견훤은 왕건의 조카 왕신(王信)을 죽이고 다시 고려를 공격하였다.
927년 견훤은 근품성(近品城)9)을 공격하고,고울부(高鬱府)10)를 습격하였다. 이어 경주로 진격해 신라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하는 비도덕적 행위를 자행하여 현재로 말하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견훤은 김부(金傅)를 경순왕(敬順王)으로 즉위시켜 경애왕의 뒤를 잇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출병하여 공산(公山)11)에서 견훤과 결전했으나, 크게 패했고 이 공산전투에서 신숭겸(申崇謙)12)·김락(金樂)13) 등이 전사하였다. 왕건은 겨우 도망쳐 위기를 모면하였다.
다음해 견훤은 강주(康州)14)를 공격해 3백여 인을 죽이고,부곡성(缶谷城)15)을 공격해 1천여 인을 참살하였다.
929년 7월 견훤은 갑병(甲兵)16) 5천여 인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했고, 왕건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성주 홍술(洪述)을 죽였다. 또한 일직(一直),순주(順州)17)를 함락하고 계속해서 고창군으로 밀려들었다.
929년(태조 12년) 12월 견훤이 고창을 포위하자 왕건은 고창을 구원하기 위하여 원병을 고창으로 파견하게 된다.
고려군은 죽령(竹嶺)18)을 넘어 풍기와 영주를 거쳐 봉화 방면으로 진군하여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를 거쳐 예안 지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고려의 원정군은 약 삼천명 정도였고 견훤의 군대는 일만 정도로 고려의 군대가 절대 열세였다. 이때 고창의 성주인 김선평(金宣平)공이 김행, 장길과 더불어 고려에 귀부하게 됨으로써 양 진영은 어느정도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전쟁범죄를 일으킨 견훤에 대하여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김선평(金宣平)공은 고창이 포위당하게 되자 고창 자력으로 견훤의 군대를 물리칠수 없음을 알고 김행, 장길과 협의하여 왕건에게 합세하게 되었다.
병산전투는 와룡면 서지리에 있는 저수봉(猪首峰) 전투에서 유금필(庾黔弼)19)이 후백제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양 진영이 대치하게 된다.
저수봉 전투에서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의 선봉대가 승리하자 왕건은 병산(甁山)에 주둔하였고, 저수봉 전투에서 패한 후백제군은 후퇴해 석산(石山)20)에 진을 쳤는데 그 거리는 약 오백보 정도였다.
절대 패배하지 않고 승승장구하던 견훤의 군대가 장기간의 원정길, 추위,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는 보급품, 타지역 원정이라는 지리적 열세 등으로 갑자기 궤멸되기 시작하여 대패하게 된다.21)
이 전투에서 견훤의 군대는 전사자가 약 8,000명이고22) 시랑(侍郞)23) 김악(金渥)을 사로잡아 죽였다.
다음날 패배한 견훤이 후퇴하면서 순주(順州)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사로 잡아 전주로 데려갔다.
후백제 견훤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그 세력이 붕괴하기 시작했고 고려 왕건은 삼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고려와 후백제 간의 싸움에서 입장이 불분명했던 영안(永安)24), 하곡(河曲)25), 직명(直明)26), 송생(松生)27) 일대의 30개 군현이 병산전투 이후 고려에 귀부하고 곧이어 명주(溟州)28)부터 흥례부(興禮府)29)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110여 성(城)이 역시 고려에 귀부하였다.
2)전설로 본 병산전투
전설에 따르면 견훤(甄萱)은 원래 지렁이였기 때문에 전투가 불리하면 땅속으로 숨어버리곤 하여 좀처럼 견훤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견훤이 본래 지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삼태사(김선평,김행,장길)께서는 사전에 물에 소금을 풀어 염수를 만들어 놓고 전투를 시작했다. 전투가 불리해지자 견훤은 땅속으로 숨었고 삼태사께서 염수를 그 곳에 부으니 견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다는 ‘진모래전설‘이 있다.
또 ‘밥박골’의 안중구 할머니는 마침 적진에 살고 있어서 적의 동태를 파악하여 삼태사군에게 알려주고 또 고삼 뿌리를 섞은 독한 술을 만들어 후백제군의 장수들에게 주었는데 이 술을 후백제군이 마시고 만취하자 이를 삼태사군에 알려 삼태사군이 대승할 수 있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병산전투의 영향으로 생겨난 지명이 있다. 합전교(合戰橋)는 현재 안동시 송현동에 있고 말구리는 후퇴하던 견훤이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또 와룡면에 있는 가수천은 원래 간수천으로 소금물을 풀었다는 냇가이다. 이 냇가는 병산 전투때 시체가 너무 많아 물이 거꾸로 흘렀다고 하여 역수천이라고도 한다.
3)병산전투(甁山戰鬪)와 차전놀이
디지털안동문화대전에 보면 차전놀이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렁이로 변한 견훤을 격퇴시킨 역사적 사건과 차전놀이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태사 김선평(金宣平), 김행(金幸), 장길(張吉)등이 안동 병산전투에서 견훤이 지렁이의 화신임을 알고 많은 소금을 낙동강 물에 푼 뒤 군민 전체가 단결하여 인해전술로 견훤군을 강물로 밀어 붙여서 참패케 하였다.
삼태사가 군민과 등짐장수들을 불러 승전을 축하하면서 차전놀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때 등짐장수들은 흥에 넘쳐 쪽지게30) 위에 우두머리를 올려 태우고 “월사 덜사”하고 승전가를 부르며 뛰어 놀았다. “월사 덜사”에서 월사(越沙)는 견훤이 모래골을 넘어 도망가는 뜻이라고
한다.
그 후 이것을 본 군민들은 쪽지게를 본 따 놀이기구를 만들어 덕망 있는 사람을 태우고 양편으로 나누어 놀이를 하여 전승을 기념하니 이것이 차전의 효시이다.
1608년 선조 때 차전놀이의 양편을 동부·서부로 구분하였는데, 읍부는 안동 시내 천리천을 경계로 하였고, 면부는 낙동강 주류 북강을 경계로 나누었다고 한다.
안동 사람들은 지렁이를 떠밀 때처럼 떼를 지어 차전놀이를 하였고, 놀이를 할 때는 손을 쓰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어깨로 서로 밀어댄다고 한다.
3.공신책록(功臣策錄)
병산전투가 대승으로 끝난후 왕건은 김선평, 김행, 장길등 세사람에게 공신 책록을 하였다. 성주 김선평에게는 대광(大匡)31), 김행과 장길에게는 대상(大相)32)을 하사하고 세사람 모두에게 태사(太師)의 벼슬을 내렸다. 또한 세사람 모두에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33)을 하사하고 김선평에게는 안동김씨(安東金氏), 김행에게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장길에게는 안동장씨(安東張氏)라는 성(姓)을 내렸다. 이로써 세사람이 안동김, 권,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또 시조(始祖) 김선평(金宣平)공에게는 아부공신(亞父功臣)이라 칭하였는데 여기서 아부(亞父)34)는 “아버지 다음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왕건이 그민큼 존경했다는 뜻이다.
또 삼중대광(三重大匡)35)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부라 하기도 하였다.
왕건은 병산전투의 승리로 '동쪽(東)이 편안(安)하게 됐다'며 고창의 지명을 안동으로 바꾸었다. 또 일직,순주를 병합하여 군(郡)을 부(府)로 승격시켰다.
개경(開京)36), 서경(西京)37), 남경(南京)38), 동경(東京)39)의 4경과 안동대도호부를 설치하여 안동을 5대 중요 지역으로 삼았다. 이때 설치된 안동도호부가 대도호부가 되어 이조 말기 까지 유지 되었다. 그만큼 안동은 왕건에게는 중요한 지역이었는데 그것은 견훤과의 싸움에서 패배 직전까지 갔으나 삼태사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1) 병산서원(屛山書院) :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업적 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 산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2) 보마군(步馬軍) : 보병과 기병
3) 대야성(大耶城) : 현재의 합천
4) 진례성(進禮城) : 현재의 무주
5) 경명왕(景明王) : 재위 917∼924. 성은 박씨, 이 름은 승영(昇英). 아버지는 제53대 신덕왕, 어머 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資 成 · 懿成 · 孝資王后), 할아버지는 선성대왕(宣 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兼, 또는 銳謙)이다.
6) 아찬(阿粲) : 신라때의 벼슬 17관등중 6번째
7) 문소성(聞韶城) : 현재의 의성
8) 조물성(曹物城) : 위치에 대해서는 경상북도 안 동 지방, 구미 금오산성(金烏山城), 김천시 조마 면, 의성 등으로 추측되나 『고려사(高麗史)』 태조세가(太祖世家)에 “ 죽령(竹嶺)의 길이 막혀 왕충(王忠) 등에게 명해 조물성에 가서 정탐하도 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죽령에 가까운 경상북도 지역인 것 같다.
9) 근품성(近品城) : 현재의 상주
10) 고울부(高鬱府) : 현재의 영천
11) 공산(公山) : 팔공산,대구광역시 동구와 군위군, 경상북도 경산시와 영천시 그리고 칠곡군에 넓게 걸쳐 있는 태백산맥 줄기의 산이다.
12) 신숭겸(申崇謙) : 고려 전기에,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였으며, 후백제군과의 공산전투에 서 왕건을 구하다 전사한 무신 · 공신.
13) 김락(金樂) : 고려 전기에, 후백제와의 공산전투 에서 태조를 구하다 전사한 장군 · 공신.
14) 강주(康州) : 경남 서부지역에 위치
15) 부곡성(缶谷城) : 현재의 군위군
16) 갑병(甲兵) : 갑옷을 입은 병사
17) 순주(順州) : 현재의 안동시 풍산읍
18) 죽령(竹嶺) :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상의 고개이다.
19) 유금필(庾黔弼) : 고려(高麗)의 무신(武臣)이며 개국공신이다. 평주(平州) 출생이며, 평산 유씨 (平山 庾氏)의 시조이다.
20) 석산(石山) : 와룡면 서지리
21) 드라마 태조 왕건편에 이 전투에 관한 장면이 나 온다.
22) 8천여 명이었다: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12 년(929) 12월조에 따르면 이때 견훤이 고창군을 포위하자 왕건이 친히 구원에 나섰다고 한다. 고 창전투는 930년 정월 21일 벌어졌는데, 그 과정 은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13년(930) 정월 병술조와 『고려사』 권92 열전5 유금필전에 자 세하게 전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다소 과 장된듯하다.
23) 시랑(侍郞) : 정4품 관직
24) 영안 : 현재 안동 풍산
25) 하곡 : 현재 안동 임하
26) 직명 : 현재 안동 일직
27) 송생 : 현재 청송
28) 명주(溟州) : 현재 강릉
29) 흥례부(興禮府) : 현재 울산
30) 쪽지게 : 등짐장수들의 지게
31) 대광(大 匡) : 종 1품 괸직 16등급중 2번째
32) 대상(大相) : 16등급중 7번째
33)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린 공신중 공신당에 벽화로 그려진 인물들의 총칭.
홍유(洪儒:殷悅 의성)
배현경(裵玄慶 성산)
유금필(庾黔弼 무송인)
복지겸(卜智謙 목주)
신숭겸(申崇謙 평산인)
김선필(金宣弓 선산인)
이총언(李총言 벽진인)
김선평(金宣平 안동인)
권행(權幸 안동인)
장정필(張貞弼 안동인)
윤신달(尹莘達 파평인)
최준옹(崔俊邕 동주인)
문다성(文多省남평인)
이능희(李能希 청주인)
이도(李棹 전의인)
허선문(許宣文 양천인)
구존유(具存裕 능성인)
원극유(元克猷 원주인)
금용식(琴容式 봉화인)
김훤술(金萱術 해평인)
한란(韓蘭 청주인)
강여청(姜餘淸 냉천인)
손긍훈(孫兢訓 밀양인)
방계홍(房係弘남양인)
나총례(羅聰禮 금성)
이희목(李希穆 부평)
염형명(廉邢明 서원-파주)
최필달(崔必達 강릉)
김홍술(金弘述)
김락(金樂) 등이다
34) 아부(亞父) : 임금이 공신(功臣)을 존경(尊敬)하 여 부르던 말. 초(楚)나라의 항우(項羽)가 범증 (范增)을 존경(尊敬)하여 부른 말에서 왔음.
35) 고려 시대에 둔 향직의 일품 상(上) 품계
삼중대광은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벼슬임으로 시 기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다.
36) 개경(開京) : 개성
37) 서경(西京) : 평양
38) 남경(南京) : 양주라고 하기도 하고 한성이라고도 한다
39) 동경(東京) : 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