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 | 상준(尙寯) |
자(字) | 여수(汝秀) |
호(號) | 휴암(休庵) |
생(生) | 1561년 신유(辛酉) 05월 11일 |
관직(官職) | 임오(壬午)진사(進士) |
| 경인(庚寅)문과(文科) |
| 역한원(歷翰苑) |
| 가의대부(嘉義大夫) |
| 형조참판(刑曹叅判) |
| 증(贈)좌찬성(左贊成) |
저서(著書) | 속옥로(續玉露) 강감요략(綱鑑要略) |
| 一五八二년(선조一五년) 二二세 약관의 나이에 향시 초시(初試)와 발해시( |
| 發解試)에 제二등(第二等)으로 선발되어 천거될때 율곡(栗谷)이이(李珥)가 |
|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그의 재주를 매우 칭찬하였다. 그해(一五八二년) |
| 진사시에 입격하고 一五八五년 모친상을 당했을때 선상(善喪)으로 상(喪) |
| 을 잘 치렀다고 칭찬을 받기도하였다. 三년상을 끝마치고 더욱 힘써 책을 |
| 읽었는데 아침부터 깊은 밤중(丙夜)에 이르도록 책 읽기를 그치지 않으니 |
| 함께 공부하던 여러 종제(從弟)들이 공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그들도 또 |
| 한 능히 책을 보지 않고서도 글을 외웠다 한다.一五九○년(선조二三년) 三 |
| ○세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괴원(槐院:承文院:외교문서를 담당한 관 |
| 청)에 선임되었는데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 |
| 一五九二년(壬辰年 선조二五년)에 체찰사 심수경(沈守慶)이 호서지방(湖西 |
| 地方)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건의토왜(建議討倭:倭賊을討伐)할 때에 |
| 김상준을 벽소(辟召)하여 종사(從事)하는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는데 막 |
| 료(幕僚)의 군중(軍中) 계획들이 김상준에게서 많이 나왔으므로 심수경이 |
| 그를 심히 중하게 여겼다.一五九三년(선조二六년)에는 행재소(行在所:임금이 |
| 궁을떠나 나들이하거나 전시 변란등의 사유로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에 나 |
| 아가서 승정원(承政院)주서(主書)에 제수됐고 곧 예문관(藝文館)검열(檢閱 |
| )을 거쳐 예문관(藝文館)대교(待敎)로 승진했다. 一五九四년(선조二七년) |
| 예문관(藝文館)봉교(奉敎)에 승임(陞任)되었고 자리를 옮겨 병조좌랑(兵 |
| 曹佐郞)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겨갔다.一五九五년(선조 |
| 二八년) 강원도 어사(御史)로 파견되었다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다 |
| 는 이유로 사간원(司諫院)으로부터 탄핵(彈劾)받아 체직되기도 하였다. 얼 |
| 마 지나지않아 영광군수(靈光郡守)에 임명되어 三년동안 지방관으로서 성실히 |
| 근무하였으며 一五九六년(선조二九년) 九월 영광군수 재직시 삼도수군통제사 |
|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장군을 만나 왜란극복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기도 |
| 하였다. 一五九七년 영광군수 재직중 왜적이 호남(湖南)을 핍박(逼迫)하 |
| 니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은 모두 무관(武官)으로 바뀌게 되어 김상준 |
| 은 관찰사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一五九七년 정유재란때에는 관찰사의 |
| 종사관으로 분호조판서 이광정의 종사관 강항(姜沆)과 함께 전라도 영광에서 |
|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으며 군량비확보에도 힘썼다.一五九八년(선조三一년) |
| 호남조도사(湖南調度使)로 임명되어 명나라 수군에게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
| 군자감정(君子監正)을 거쳐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로 옮겼다가 一五九九년六 |
| 월 내섬시정(內贍寺正)이 되었다. 一五九九년(선조三二년)八월 공주목사(公 |
| 州牧使)가 되어 공주군에 산성을 수축하였고 一六○二년 병으로 관직을 사임 |
|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대신(大臣)이 또 공을 천거하여 사도조도사(四道 |
| 調度使)에 임명되었다. 관동(關東)과 영남(嶺南) 및 호남(湖南) 호서( |
| 湖西) 지방에 출입하면서 험준(險峻)한 수천리의 험로(險路)를 거쳐 속량 |
| (粟糧)수만석을 확보하였다.一六○四년(선조三七년) 해주목사(海州牧使)를 |
| 지내고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一六○五년 다시 죽주부사(竹州 |
| 府使)에 발령되어 부임하였다. 一六○八년二월 승정원(承政院)동부승지(同副 |
| 承旨)에 임명되었다가 一六○九년三월 경주부윤(慶州府尹)거쳐 승정원좌부승지 |
| (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이어 명나라에 파견될 천추사(千秋使)로 선발되 |
| 어 명나라 북경에 입조(入朝)하고 귀국하였으며 돌아와서 一六○九년八월 승 |
| 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 一六一○년一월 승정원(承政院)좌승지(左 |
| 承旨)를 지냈다.명나라 만력제(萬曆帝 一五六三년~一六二○년 明의 제一三대 |
| 황제) 신종(神宗)이 태감(太監) 염등(冉登)을 보내어 책봉하는 글을 |
| 내릴 때에 김상준이 예방승지를 맡아서 신종의 책봉서를 주선하는데 궐전(闕 |
| 典)이 없이 임무를 잘 수행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특진 승정원(承政院 |
| )도승지(都承旨)로 기용되었다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부총관(副 |
| 總管)을 겸하였다. 그 이듬해(一六一二년一월)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
| 형조참판(刑曹參判) 겸(兼) 동지춘추관사의금부사(同知春秋館事義禁府事)가 |
| 되었다.一六一三년(광해군五년) 계축옥사 때 무고로 체포된 뒤 광해군의 |
| 친국(親鞫)을 받으면서 고문에 못 이겨 김제남(金悌男)과 함께 영창대군( |
| 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다고 허위 진술해 삭출당하였다. 一六一八년(광해군 |
| 一○년)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날 때 사촌동생 김상헌(金 |
| 尙憲)및 아들 김광욱(金光煜)과 함께 정청에 끝까지 참여하지 않고 경기도 |
| 고양(高揚)등에 은거하며 지내다가 광해군의 미움을 받아 사직 당하였으며 |
| 그 후 오랫동안이나 벼슬에 기용되지 못했다.一六二三년(인조원년) 인조반 |
| 정(仁祖反正) 후에는 계축옥사 때 연안부원군 김제남을 모함한 죄로 함경도 |
| 길주(吉州)에 유배되고 一六二七년 충청도 아산에 이배되었다가 一六三三년 |
| 사면을 받고 一六三五년에 풀려나왔다. 함경도 길주(吉州)에 귀양 가 있 |
| 을 때에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잘 이끌러 선유 |
| (善誘)하였기 때문에 신발이 처마밑에 가득하여 고을의 자제(子弟)들이 점 |
| 점 향학(向學)하는 이가 많았는데 뒤에 공의 부음(一六三五년 八월 二九일 |
| )을 듣고 모두 다 천리 밖에서 조부(弔賻)를 하였다 한다. |
졸(卒) | 1635년 을해(乙亥) 08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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