系子 | 옥균(玉均) |
생부(生父) | 병태(炳台) |
자(字) | 백온(伯溫) |
호(號) | 고균(古筠) |
생(生) | 1851년 신해(辛亥) 01월 23일 |
| 충청도공주 출신. 병태(金炳台)의 장남으로 七세 때 당숙 병기(炳基)에게 |
|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一一세 때인 一八六一년 양부 김병기가 강릉 |
| 부사에 임명되어 임지에 가자 양부를 따라 강릉에 가서 一六세까지 율곡사당 |
| (栗谷祠堂)이 있는 서당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어 |
| 려서부터 학문뿐 아니라 문장·시·글씨·그림·음악 등 예능부문에서 탁월한 |
| 소질을 발휘하였다.당시 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박규수(朴珪壽) |
| 등에 의해 근대적 개혁을 위한 개화사상이 형성되고 있었다. 고균은 다른 |
| 청년들과 함께 一八七○년 전후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고 |
| 발전시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一八七二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一八 |
| 七四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부터 정치적 결사로서 |
| 의 개화당의 형성에 진력하여 다수의 동지들을 모아 지도자가 되었다.一八七 |
| 九년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파견해 일본의 근대화 실태를 알아보 |
| 게 하였다. 그리고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파견을 주선하도록 하였다. |
| 국내에서 혁신의 뜻을 가지고 있는 관리들과 청년들을 모아 개화당의 세력확 |
| 장에 진력하였다.고균은 스스로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시찰하기 위해 一八八 |
| 一년 음력 一二월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진전 과 |
| 정을 돌아보고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의 정치적 동향 |
| 등을 상세히 파악하였다. 돌아오는 도중에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에 이르 |
| 렀을 때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국하였다. |
| 제一차 도일(渡日) 직후에 『기화근사(箕和近事)』를 편찬하였다.임오군란이 |
| 수습된 뒤 승정원우부승지·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이조참의·호 |
| 조참판·외아문협판(外衙門協辦)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자주근대화와 개화당의 |
| 세력 확대에 진력하였다.고균은 일본이 동양의 영국과 같이 되어가는 것을 |
|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나라의 |
| 완전 독립을 성취하여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 전반에 대경 |
| 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양반신분제도의 폐지 문벌 |
| 의 폐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 국가재정의 개혁 공장제도에 의 |
| 거한 근대 공업의 건설 광업의 개발 선진 과학기술의 도입과 채용 상업의 |
| 발달과 회사제도의 장려 화폐의 개혁 관세 자주권의 정립 농업과 양잠의 발 |
| 전 목축의 발전 임업의 개발 어업의 개발과 포경업의 개발 철도의 부설과 |
|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에 의거한 통신의 발전 인구 조사의 실시 등을 주장 |
| 하였다.또한 학교를 널리 설립하고 신교육의 실시를 주장했다. 자주 국방력 |
| 양성 경찰제도의 개혁 형사행정의 개혁 도로의 개선과 정비 위생의 개혁 |
|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조선의 중립화 등도 주장하였다.김옥균은 이러한 |
| 주장을 국가 정책으로 실천하고자 했으나 청국의 극심한 방해를 받았다. 당 |
| 시 청국은 임오군란의 진압을 위해 三○○○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해 대원 |
| 군을 납치해 갔다. 임오군란을 진압하여 민씨정권을 재수립한 뒤에도 철수하 |
| 지 않고 청군을 그대로 서울에 주둔시킨 채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屬邦 |
| 化)하기 위한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자행하였다.청국은 김옥균 등의 자주근대 |
| 화정책이 그들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는 것이며 청국으로부터의 조선 독립을 |
|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고 김옥균 등의 개화당과 개화정책을 극도로 탄압하였다 |
| . 청국의 도움으로 재집권한 민씨친청 사대수구파들도 이에 야합하여 김옥균 |
| 등 개화당을 박해하였다.임오군란 후 一八八二년 九월 고균은 수신사 박영 |
| 효(朴泳孝)의 고문이 되어 제二차로 일본에 건너갔다. 수신사 일행을 먼저 |
| 귀국시키고 서광범(徐光範)과 함께 더 체류하면서 본국으로부터 유학생들을 |
| 선발해 보내도록 하여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입학시킨 다음 一八八三년 三월 |
| 귀국하였다. 당시 일본 동경에 체류하는 동안 『치도약론(治道略論)』을 |
| 저술하였다.一八八三년 六월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제三차로 일본에 건너가 |
| 서 국채(國債)를 모집하려 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Mӧllendorf |
| f P.G.)와 민씨 수구파의 사주를 받은 주조선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 |
| 進一郎]가 김옥균이 휴대한 고종의 국채위임장을 위조한 것이라고 본국에 허 |
| 위 보고하었다. 이로써 국채 모집은 완전히 실패하고 一八八四년 四월 귀국 |
| 하였다.고균은 세 차례에 걸친 도일 과정에서 닥쳐올 나라의 위기를 급박하 |
| 게 느껴 더욱 초조해졌다. 김옥균이 개화정책을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청국 |
| 및 왕비 민씨 수구파와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이에 고 |
| 균은 정변(政變)의 방법으로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나라를 구하기 위한 ‘ |
|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할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청국과 프랑스가 안남 |
| 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의 조짐을 보이자 一八八四년 五월 청국은 조선에 |
| 주둔시킨 三○○○명의 청군병력 중에서 一五○○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켜 |
| 서울에 청군은 一五○○명만 남게 되었다. 一八八四년 八월 마침내 청·불 |
| 전쟁이 일어나 청국은 연전연패하였다. 이에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킬 기회가 |
| 왔다고 판단 一八八四년 九월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 |
| 정하였다.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일본에 갔다가 그 해 一○월 三○일 서울에 |
| 귀임하여 종래의 개화당에 대한 적대정책을 바꾸어 개화당에 접근하였다. 김 |
| 옥균은 정변에 대한 청군의 무력 개입을 막는 데 이용하기 위해 조선군 一 |
| ○○○명 이외에 일본공사관 호위용의 일본군 一五○명을 정변에 끌어들이는 |
| 계획을 세웠다.一八八四년 양력 一二월 四일(음력 一○월 一七일) 우정국 |
| 준공 축하연을 계기로 마침내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그날 밤으로 민씨 수 |
| 구파의 거물 대신들을 처단하고 一二월 五일 이재원(李載元: 국왕의 종형) |
| 을 영의정으로 홍영식(洪英植)을 좌의정으로 한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하였 |
| 다.고균은 신정부에서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참판을 맡아 재정권을 장악 |
| 하고 실질적으로 정변과 신정부를 모두 지휘하였다. 개화당은 정권을 장악하 |
| 자 一二월 五일 저녁부터 六일 새벽까지 밤을 새워가며 회의를 열어서 김옥 |
| 균의 주도 하에 혁신정강(革新政綱)을 제정하였다. 六일 오전 九시 경에 |
| 국왕의 전교형식(傳敎形式)을 빌려 공포하였다. 이 날 오후 三시에는 국왕 |
| 도 추인하여 대개혁정치를 천명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국정 전반의 대개혁 |
| 이 이루어질 듯 하였다.그러나 청군 一五○○명은 이 날 오후 三시부터 갑 |
| 신정변을 붕괴시키기 위한 무력 개입을 시작해 불법으로 궁궐에 침입 공격해 |
| 들어왔다. 외위(外衛)를 담당했던 조선군이 청국 침략군에 저항하다가 패 |
| 퇴하였다. 그러자 중위(中衛)를 맡았던 일본군도 개화당이 사태를 수습할 |
| 사이도 없이 도망하고 철수해 버렸다. 이처럼 청군의 무력 공격을 방어하지 |
| 못해 갑신정변은 실패했고 고균 등 개화당의 집권은 ‘삼일천하(三日天下) |
| ’로 끝나고 말았다.고균은 후일의 재기를 기약하고 박영효·서광범·서재필 |
| 등 九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망명한 |
| 김옥균을 박해하였다. 一八八六년 八월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귀양을 보 |
| 냈으며 또한 一八八八년 북해도(北海道)로 추방하여 연금시켰다.그 뒤 동경 |
| 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一八九四년 三월 청국의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 |
| 러나 민비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상해동화양행(東和洋行) |
| 객실에서 암살당하였다. 청국과 민씨 수구파 정부는 야합하여 시체를 서울양 |
| 화진(楊花津)에 실어다가 능지처참하였다.四개월 뒤에 갑오개혁으로 개화파정 |
| 부가 수립되자 이듬해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상소에 |
| 의해 죄가 사면 복권되었다. 一九一○년 규장각대제학에 추증되었다.저서로 |
| 는 『기화근사(箕和近事)』·『치도약론(治道略論)』·『갑신일록(甲申日錄)』 |
| 등이 있다. 시호는 충달(忠達)로 우국망가(憂國忘家) 나라를 걱정하여 |
| 집안일을 잊음을 충(忠) 이라 하고 소중통례(疏中通禮) 상소문이예법에 통 |
| 달함을 달(達) 이라 한다 . |
졸(卒) | 1894년 갑오(甲午) 03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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